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(문단 편집) === 1364년, 김속명의 진해 전투 === 이런 일이 있은 후 5월, 고려는 뜻밖의 대승을 거두었다. 경상도 도순문사(都巡問使)로 나가있던 김속명(金續命)이 진해현(鎭海縣)에서 '''3천여명의 왜구를 격파한 것.''' 이때 왜구는 김속명의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해 재빨리 배에 타서 도주하지 못하고 산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고, 산에서 목책을 쌓고[*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왜구가 고려에서 펼친 이러한 산성전술은 몇몇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왜구=고려인설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로, 동시기 일본 기록을 보면 기사들이 서로 평지에서 활로 싸우던 고전적인 일기토에서 산을 끼고 창을 둘러 버티는 산성전술이 널리 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.] 버티려 했지만 김속명이 밀어붙여 공격을 퍼붓자 왜구는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. 이 김속명의 승리는 당시까지 왜구에 당하던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. 왜구를 상대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 황산대첩 역시 1만 ~ 2만 사이의 왜구를 물리친 전투였으니, 3천명을 물리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. 김속명이 승리를 거둔 후 노획한 무기들을 바치니 공민왕은 중사(中使)를 보내어 옷과 술과 금띠를 하사했으며 군사들에게는 전공에 따라 관작을 주었다고 한다.[* 그러나 김속명은 사람이 워낙 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라 윗 사람들에게 미움 받아 지방의 안무사(安撫使)로 떠돌았으며, 권력자들의 살해 위협에도 시달렸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